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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한국사 뒷 이야기한국사 2025. 8. 14. 14:01
‘그날의 기록 – 위화도 회군’ 한국사 뒷 이야기
위화도의 강가에 선 이성계
1388년 음력 5월,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威化島)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려 조정이 명나라의
요동 정벌을 명하자, 5만 대군을 이끈 이성계는 이미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새벽녘 강가의
안개 속에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몽골과 왜구의 침입으로 지친 백성, 흉작과 전염병으로
약해진 국력, 그리고 명나라와의 불필요한 전쟁이 가져올 파멸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성계가 이 자리에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회군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a) 시기상 부적합, b) 군사력 부족, c) 백성의 피폐, d) 전선 장악의 불리함을
이유로 원정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미 이성계와 최영 장군 간의 정치적 불신이 깊었고, 요동 정벌이 사실상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권력 투쟁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눈에는 전쟁터가 아니라 권력의 함정이 펼쳐져 있었다.
위화도 강변에서 새벽 북소리가 멈추고, 병사들은 출정 대신 회군 준비를 시작했다.
이성계의 결단은 ‘군율 위반’이라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지만, 그는 이미 선택을 마쳤다. 그날 새벽,
고려의 운명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낮, 북을 울리며 한양으로 – 군사 반전의 시작
정오 무렵, 이성계의 군대는 압록강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깃발은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했고, 병사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의가 함께 서려 있었다. 군율상 왕명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이었지만, 병사 대다수는 회군
명령을 환영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전쟁의 무의미함과 무모함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군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정치적 반전 작전이었다. 이성계는 군을 재정비하며 개경을 향해 신속하게
진군했다. 군사 조직을 잘 아는 그는 행군 속도와 보급로를 치밀하게 계산했고, 개경 방어군의 전력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야사에는 회군 도중 일부 장수들이 ‘혹시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며 망설였으나,
이성계가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단호한 한마디로 군심을 붙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날 낮,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최영 장군은 즉시 방어를 준비했지만,
속전속결로 움직이는 회군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성계의 속내는 명확했다. 요동 정벌을 막는 것과
동시에, 부패한 조정을 개혁하거나 교체하는 것. 위화도 회군은 그 목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해질녘, 개경의 문 앞에 선 변화의 서막
해질 무렵, 회군군은 이미 개경 외곽에 도착했다. 도시 안은 혼란에 휩싸였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저항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군사적 우위는 명확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국경을 향해
나아가던 대군이, 하루 만에 수도를 포위한 것이다.
정사에는 이후의 사건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는 무혈입성 후 최영을 체포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야사에서는 이 장면이 훨씬 극적으로 전해진다. 최영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나라를 팔아먹는구나”라고 꾸짖었다는 이야기, 이성계가 침묵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위화도 회군의 그날은 단지 군사 반란의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대전환의 시발점이었다. 회군 직후 이성계는 개혁과 권력 장악을 동시에 진행하며,
새 왕조 창업의 길을 닦았다. 역사학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 날은 ‘한 장군의 결단’이자
‘한 왕조의 운명을 바꾼 하루’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 회피라는 명분과,
권력 재편이라는 현실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계산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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