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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대척점과 한국사
    한국사 2025. 8. 11. 15:26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대척점과 한국사 뒷 이야기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한국사 뒷 이야기

    권력의 시작부터 다른 길을 걷다

    명성왕후 민씨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 말기 정치사의 가장 상징적인 대립 구도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였지만, 실제 정치 무대에서는 국정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자였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려 1863년부터 10년간 섭정하며 왕권 중심의

    절대 권력과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반면 명성왕후는 1866년 고종과 혼인하며 궁궐에 입성했으나,

    초반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관계가 급격히 변한 것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년 이후다. 대원군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명성왕후는 남편 고종의 친정을 강력히 뒷받침하며 시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조선이 더 이상 쇄국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외교·군사 개혁을 위해 청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친청 정책을 택했다. 이는 쇄국과 독자 노선

    고수하던 대원군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노선이었다.

     

    야사에서는 명성왕후가 권문세가 출신이라는 점이 대원군의 반감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었기에, 다시 민씨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을 극도로 꺼렸다.

     

    반면 명성왕후는 친정 세력을 통해 궁중 내 입지를 확대하고, 외부 세력(, 러시아, 일본)을 외교 카드로

    활용해 고종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이 시점부터 두 사람은 가족 관계를 넘어선 정치적 라이벌이 되었고, 그 갈등은 이후 조선 외교와 국내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된다.

     

    외교 노선의 충돌과 권력 경쟁

    두 사람의 가장 큰 대척점은 외교 노선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며

    서양 세력을 국가 존망을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했고,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대응했다. 그는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해 통상 거부와 국경 방어를 강화했고, 이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명성왕후는

    국제 정세를 다르게 보았다. 개항은 불가피하며, 외교를 통해 열강 사이에서 조선을 지켜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졌다.

     

    명성왕후의 친청 정책은 단순히 청나라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일본과의 외교 접촉을

    통해 세력 균형을 꾀했고, 특히 일본의 급격한 부상에 주목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런 행보를

    외세에 의존하는 위험한 도박으로 보았고, 심지어 고종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이 외교 노선의 차이는 고종을 사이에 둔 궁중 권력 다툼과 직결되었다.

     

    야사에는 명성왕후가 대원군의 복귀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청나라의 원세개와 접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대원군의 복귀를 외쳤고, 실제로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명성왕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그를 톈진으로 압송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라,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권력 투쟁이 국제 군사 개입으로 이어진 사례였다.

    이후 대원군은 사실상 정치 1선에서 밀려났고, 명성왕후는 조선 정치와 외교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대립의 끝과 역사적 평가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대립은 조선 말기의 정치 구조를 양분했다. 대원군은 끝까지 왕권 절대화와 쇄국이라는 노선을 고집했고, 명성왕후는 왕권 보완과 개방적 외교라는 노선을 추진했다. 두 사람 모두 조선을

    지키려 했지만, 접근 방식과 세계관이 달랐다. 대원군의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주권 수호에 효과적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명성왕후의 방식은 국제 정세에 대응하려 했지만 외세 의존도가 높아져 주권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1880년대 후반 이후 명성왕후는 청나라뿐 아니라 러시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했다. 그러나 이러한 친러 외교는 일본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895년 을미사변에서 명성왕후가

    일본 세력에 의해 시해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대원군은 을미사변 직전 일본에 의해 다시 정치 전면에 불려 나왔지만, 이는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고, 조선의 운명을 바꿀 힘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두 사람의 대립은 조선 말기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대원군은 국내 개혁과 권력 집중을 통해 내부를 다지고자 했고, 명성왕후는 외교와 국제정치의 힘을 빌려

    외부 위협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서로의 방식이 양립할 수 없었고, 협력은커녕 권력 다툼으로 소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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