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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목표 한국사 뒤 이야기
    한국사 2025. 8. 9. 13:54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목표와 한국사 뒷 이야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목표 한국사 뒤 이야기

    혼란한 조선,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권력 장악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

    심화되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세도정치로 권문세가가 국정을 농단하며 왕권은 크게 약화됐다.

    국제적으로는 서양 열강과 일본이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개항 압박이 거세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왕위 계승 문제라는 정치적 공백을 기회로 삼았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비 조씨와 일부 대신들의 합의로 그의 아들 이명복(훗날 고종)

    왕위에 오르고, 대원군은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목표는 무엇보다 흔들린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에, 어린 아들을 통해 실질적인 절대 권력을 확보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재건하려 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도정치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권문세가의 인사 독점을 해체하고, 인사권을 국왕 직속으로 환원하여 관료 조직의 충성심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대원군은 이때 관료 사회의 줄대기 문화와 지방 수령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직접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부패 사례를 공개적으로 처벌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동시에 기득권 세력의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훗날 그의 몰락에 정치적 씨앗이 되었다. 대원군의

    집권 초기 목표는 명확했다.

    왕실의 권위 회복, 국가 기강 확립, 외세 차단이 세 가지가 그의 모든 정치 행보의 기초였다.

     

    왕권 강화와 쇄국정책, 그리고 숨겨진 의도

    흥선대원군의 정치 목표 중 두 번째 축은 국왕 권위를 상징적으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1865년부터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법궁을 재건하는 일은

    왕권의 부활을 상징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공사는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주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기존 화폐 가치의 100배로 표기된 동전)은 인플레이션을 불러 민생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겉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상징 사업이었지만, 속내에는 대원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후세에 왕실 부흥의 주역으로 기록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또한 그는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했다.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사상적 침투로 보고, 1866년 병인박해를 단행하여 수천 명의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 이는 곧 병인양요로 이어졌고, 대원군은 이를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 승리로 선전하며 민심을 결집했다. 1871년 신미양요에서도 같은 기조를 유지하며, “서양과의 통상은 절대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뒷이야기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대원군은 단순히 외세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외교 창구를 국왕과 소수 핵심 세력에게만 독점시키려는 권력 전략도 있었다. 외세와의 접촉 창구가 넓어지면 신흥 세력이

    부상해 권력 분산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쇄국정책은 외세 차단이라는 명분 아래 권력 집중이라는 실리를 추구한 이중 전략이었다. 이 점이 후일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방정책을 모색할 때, 대원군과의 충돌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몰락과 유산, 그리고 정치 목표의 역설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목표는 결국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좌절됐다. 명성황후와 친정 세력,

    그리고 개화파 일부는 대원군의 전제적 권력과 보수적 쇄국 정책이 조선을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 정치의 그림자로 남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군인들과 민중은 대원군의 복귀를 외쳤고, 그는 잠시 권력을 회복했으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납치돼 톈진으로 압송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 생애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고, 이후 그는 더 이상 국가 운영의 중심에 설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 목표는 겉으로는 왕권 강화와 국권 수호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을 근대화의 흐름에서

    뒤처지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지향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폐쇄적 외교는 단기적으로는 국권을 지켰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경제·군사적 우위를 따라잡을 기회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역사학계에서도 그를 두고 조선 후기 마지막 개혁가이자 근대화의 걸림돌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무너져가는 왕실의 권위를 잠시나마 되살린 인물이자,

    조선 후기의 정치·외교 방향을 결정지은 실세로 평가받는다. 그의 정치 목표와 선택은 비록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 조선이 처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나름의 해법이었다. 뒷이야기 속 흥선대원군은

    단순한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상을 지키려 했던 보수 혁명가,

    한국사에서 여전히 논쟁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복합적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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