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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뒷 이야기 – 조선 정종의 정치사
    한국사 2025. 8. 15. 16:43

    한국사 뒷 이야기 그날의 기록' 조선 정종의 정치사

    한국사 뒷 이야기 – 조선 정종의 정치사

    1. 새벽, 개경의 정전(政殿)에서 울린 선포 왕위에 오른 날

    1398년 음력 9, 개경의 정전은 평소보다 무겁고 긴장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이 막 끝난 직후, 피로 물든 궁궐은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과(方果)는 그날 새벽 궁중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무장도, 화려한 예복도 없이 조심스럽게 정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왕위 계승의 선포였다.

     

    태조는 장남 방우와 차남 방과 사이에서 고심했으나, 1차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운 방과를 선택했다. 야사에 따르면, 방과는 본래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았고, 무거운 책임을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속에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이라는 마음으로 왕위를

    받아들였다. 이 날의 기록은 짧지만, 사실상 조선 초기 왕위 계승의 불안정성과 권력 균형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새벽의 의식이 끝난 후, 정전 밖에는 일부 대신들이 삼가 절을 올렸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궁궐의 변고

    소문을 나누고 있었다. 왕이 바뀌었지만, 그 왕이 과연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곳곳에서 번지고 있었다.

     

    2. , 도읍을 한양에서 개경으로 정치적 중심 이동

    정종이 즉위한 후, 가장 먼저 내린 중대한 결정은 도읍을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태조가

    정도전의 조언을 받아 새 도성 한양을 건설했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한양의 정치 기반은

    무너진 상태였다. 개경은 고려 왕조의 수도였고, 대신들과 종친 세력의 기반이 여전히 견고했기에,

    정종은 안정적 통치를 위해 개경 환도를 선택했다.

     

    정사에서는 이를 정국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치로 기록하지만, 야사에서는 그 이면에 권력 계산이

    있었다고 전한다. 개경은 이방원(훗날 태종)의 정치 기반과 가까웠고, 방과 자신도 개경에서 성장해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한양은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 무대였지만, 개경은 무장과 종친

    중심의 보수적 권력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정종의 환도는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행위였던 셈이다.

     

    낮의 궁궐 회의에서 정종은 대신들에게 환도의 이유를 설명하며 백성의 편의와 국방상의 이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환도 결정 후 일부 관료와 학자들은 반발했고, 한양의 신흥 관료 집단은 사실상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정종의 정치사는 안정과 보수의 선택이라는 평가와

    개혁 후퇴라는 비판이 동시에 따라다니게 된다.

     

    3. 해질녘, 양위 결심 짧지만 굵은 통치의 끝

    해질녘의 정전에서, 정종은 신하들에게 뜻밖의 결심을 전했다. 즉위 2년 만에 왕위를 동생 이방원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야사에서는 그 배경에 정치적 압박과 형제 간 합의가 있었다고 전한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왕위 계승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이방원은 이미 왕위에 오를 명분과 세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정종은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큰 내란 없이 국정을 유지했지만, 그 정치 기조는 개혁보다는 안정과 방어에 치중했다. 군제 정비, 수도 방위 강화, 일부 세법 개정 등은 그의 업적이었으나, 적극적 개혁보다는 조정

    내부 세력 균형 유지가 우선이었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치적 안전 운전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 초기 개혁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야사에 전해지는 뒷이야기 중 하나는, 정종이 양위 전날 밤 이방원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나는 칼을 들 자신이 없으니, 나라를 네 손에 맡기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한 형제간 대화가 아니라, 조선 초기 권력 이양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해질녘에

    내려진 이 결정으로, 조선은 곧 강력한 군주 태종의 시대를 맞게 되었고,

    정종은 과도기의 왕으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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