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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송논쟁 현종의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한국사 2025. 9. 4. 15:08

     

     

    현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큰 전란은 없었지만, 예송논쟁과 같은 정치·사상적 대립이

    세를 관통했으며, 이는 조선 정치사의 분열과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송논쟁 현종의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새벽, 짧은 나이로 왕위에 오르다 과도기의 군주

    1659,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8세의 왕세자 이연(李棩)이 즉위하여 조선의 제18대 임금

    현종이 되었다. 즉위식은 이른 새벽에 거행되었으나, 분위기는 침통했다.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의 이상은 미완으로 남았고, 새로운 군주는 정치적 비전을 세우기도 전에 거대한 의례와 명분의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현종의 즉위

    정사에는 현종 즉위 직후 조정이 안정적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야사에서는 즉위 당일 한 대신이

    전하의 왕좌는 아직 어린 나무 같으니, 바람이 불면 쉽게 흔들립니다라 했다 전한다. 이는 곧 현종이

    처한 정치적 한계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왕권은 안정되지 않았고, 대신들의 힘과 사상적 갈등이 곧

    조정을 뒤덮을 것이 예고된 순간이었다.

    새벽의 즉위는 단순한 권력 계승이 아니라, 효종 이후의 시대가 어떤 길을 걸을지 시험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대에 선 문제는 전쟁도 아니고 경제도 아닌, 바로 **예송(禮訟)**이라는 복잡한 의례

    논쟁이었다.

     

    정오, 예송논쟁으로 갈라진 조정 정치의 명분 싸움

    현종 정치의 정오, 가장 뜨거운 논쟁은 바로 예송논쟁이었다. 1659, 효종이 죽자 상복의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문제는 단순히 복상 기간이 아니라, 왕실의 적서 문제와

    왕권의 정통성이 걸린 사안이었다.

    서인은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적장자로 보아 1년 복상을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을 방계 출신으로 보아 3년 복상을 주장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의례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어느 세력이 왕권의 정통성을 해석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정치 투쟁이었다. 정사에는 조정이 시끄럽고 신하들이 서로 다투니 나라 사람들이 근심했다라 기록되어 있다.

     

    한국사 뒷 이야기

    더 극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정오 회의 자리에서 남인과 서인이 서로

    고함을 치며 싸우자, 현종이 책상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복상은 예에 속한 일이건만, 경들은 어찌 나라를 두 쪽 내려 하는가?”

    하지만 그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는 곧 남인 세력의 정치적 위축으로 이어졌다. 현종 정치는 전란이 없었던 대신, 의례와 명분의 문제로 치열하게 흔들린 정치였다.

    백성에게 직접적 혜택을 주지 못한 논쟁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민생과 국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조용히 사라진 군주 갈등의 유산

    현종 치세는 조용했지만,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북벌을 계승하지 못했고, 대신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으나, 당쟁은 점점 더 깊어졌다. 특히 1674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한 번 제2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도해 1년 복상을 주장하며 세력을 회복했지만, 조정은 이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명분의 굴레에 갇힌 군주

    한국사 뒷 이야기에서는 현종이 만년에 측근에게 나는 전쟁을 겪지 않았으나, 내 정치는 전쟁보다 더 고단하였다라고 토로했다고 전한다. 그는 불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시대는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왕권이 신하들의 논쟁에 휘둘리며 약화되는 구조가 뚜렷해졌고, 이는 훗날 숙종대의 당쟁 격화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해질녘의 현종은 비극적 군주였다. 전쟁도, 개혁도 아닌 의례 논쟁 속에서 치세 대부분을 소모했고, 왕권은 당파적 해석의 도구로 전락했다. 역사학자의 시선에서 현종은 나라를 지키려 했으나, 명분의 굴레에 갇힌 군주”, 그리고 조선 정치 구조의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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