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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의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한국사 2025. 9. 1. 16:20

    새벽: 임진왜란 중 분조를 이끌며 왕세자로 활약, 민심을 얻음.

    정오: 즉위 후 대동법 실시·국토 복구, -후금 사이 중립외교 추진.

    해질녘: 정치적 고립 속 인조반정으로 폐위, 현실주의 군주의 몰락.

    광해군의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새벽, 전란의 왕세자 피난길에서 왕위를 준비하다

    광해군의 정치사는 임진왜란의 불길 속에서 시작된다. 그는 원래 정통 계승 서열에서 밀려 있던

    서출(庶出) 왕자였으나,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민심을 수습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 새벽마다 전란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읽으며,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시 군주와 같은 책임을 졌다. 정사에는 세자가 분조를 이끌며 민심을 위로하니 사람들이 기댔다

    기록되어 있다.

     

    위기의 정치가

    한국사 뒷이야기에서는 그가 피난길에서 굶주린 백성들을 만나면 자신의 군량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세자는 말이 아니라 눈으로 백성의 고통을 들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광해군이 단순한 명목상의 세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위기 관리형 정치가였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그는 스스로 내가 언젠가 왕위를 맡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은 이미 결정되고 있었던 셈이다.

     

    정오, 왕위에 오른 군주 개혁과 외교의 줄타기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은 마침내 조선의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곧바로 개혁과 외교라는 두 가지 큰 과제와 맞닿았다. 우선 그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여 세제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획기적 조치였지만, 기득권 양반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외교에서는 더 큰 고민이 있었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의 전신) 사이에서 조선은 어디에도 기울 수 없는

    처지였다. 광해군은 현실을 직시하며 중립외교를 추진했다. 명의 원군 요청에도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고,

    후금과는 화친을 맺어 침략을 피하려 했다. 정사에서는 이를 왕이 명분을 버리고 현실을 좇았다라고

    비판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한국사 뒷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전란을 겪은 임금은 백성의 피를 먼저 생각했다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조선을 또 다른 대규모 전란에서 지켜냈다. 그러나 동시에 명분론을 중시하던

    사대부와 훈구·서인 세력에게는 그가 의리 없는 군주로 보였고, 결국 정치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오의 햇살처럼 그의 정책은 현실적이었지만, 그 밝음 뒤에는 이미 몰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해질녘, 폐위의 군주 반정과 몰락의 뒷이야기

    광해군 치세의 해질녘은 1623년 인조반정이었다. 대북 세력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 세력을

    포용하지 못했고, 결국 서인과 서출 왕자 능양군(훗날 인조)이 주도한 반정으로 몰락했다. 정사에는 그를

    패륜을 저지르고 의리를 저버린 군주라 규정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세력의 균형을 잃은 결과였다.

     

    패배한 군주 정치사의 모순

    한국사 뒷이야기에는 폐위 당일 광해군이 대비전에 불려가 나는 나라를 잃지 않았으나, 왕좌를 잃었구나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제주도에 옮겨져 쓸쓸히 생을 마쳤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단순한 패륜 군주로 남기지 않았다. 후대 실학자들과 개혁론자들은 광해군의 대동법

    확대, 중립외교, 실리적 국정 운영을 높이 평가하며 만약 그가 권력을 유지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 회고했다.

    광해군은 실패한 군주였으나, 동시에 조선 정치사의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명분보다 실리를, 권위보다

    백성을 우선시했으나, 그 시대의 정치 구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사학자의 시선에서 광해군은

    패배한 현실주의 군주, 그러나 조선 정치의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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