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는 없는 한국사 뒷이야기
"광해군, 조선의 가장 현대적인 군주였을지도"
영원히 반역자일 수밖에 없던 왕
광해군은 교과서에서 흔히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왕” 정도로 짧게 서술된다. 그는 명백히 반정(쿠데타)으로 쫓겨난 임금이고, 이후 사사되지 않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광해군은 단순히 권력욕에 찬 폭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통치 철학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려 했던 군주였다. 그의 불운은 시대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외교, 재정, 내치 모두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리더였지만,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를 소화하기엔 너무 보수적이었다.
실리 외교의 천재, 그러나 명분에 졌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중립 외교’였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훗날 청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에 충성하는 '사대 외교'를 해왔지만, 광해군은 후금의 성장 가능성을 예견하고 양쪽을 자극하지 않는 균형 외교를 선택했다. 1619년에는 심지어 후금에 조선군을 보내달라는 명나라의 요청을 거부하고, 간접 파병이라는 방법으로 실리를 챙기면서도 명에 대한 명분은 유지하는 절묘한 외교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외교 전략은 당시 사대주의에 깊이 빠져 있던 조선의 신하들에게 ‘변절자’로 인식되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조선 내부에서는 점차 ‘명분 없는 왕’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그가 남긴 정책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광해군은 외교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상당한 개혁적인 시도를 했다. 대표적인 것이 ‘대동법’ 시행의 확대다. 대동법은 각 지역에서 쌀로 세금을 내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제어하는 제도였다. 광해군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 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 임진왜란 이후 황폐해진 국토 복구에 힘을 쏟았으며, 왕실의 사치도 줄였다. 그는 ‘왕의 무덤도 소박해야 한다’며 능을 간소화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개혁은 조선 후기 왕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현실을 기반으로 한 통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왕의 체통을 깼다’는 비판이 거셌다. 그만큼 광해군은 시대를 앞서 있었고, 결국 그 시대가 그의 개혁을 감당하지 못했다.
실패한 군주가 아닌, 너무 일찍 온 군주
광해군은 후대에 이르러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기 이후 한국 사회가 왕조적 질서에서 벗어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강조하게 되면서, 그는 '조선의 가장 현대적인 군주’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끌어내린 인조 정권은 명분만 있고 실리가 없는 정책으로 조선을 더 깊은 혼란 속에 빠뜨렸다. 후금과의 전쟁, 병자호란의 치욕은 광해군이 남긴 외교 전략을 거부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는 광해군을 떠올리며 묻는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버텼다면, 조선은 달라졌을까?"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선 한 줄로 지나가지만, 그 그림자는 한국사의 아주 중요한 전환점에 짙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