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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예종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카테고리 없음 2025. 8. 22. 14:18

    조선시대 예종(睿宗, 14501469)**의 짧지만 굵직한 정치사를, ‘한국사 뒷이야기

     

    새벽, 왕위에 오른 병약한 군주 예종 즉위의 이면

    1468년 겨울 새벽, 창덕궁 인정전의 대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즉위식은 다른 군주들의 그것과 달랐다.

    예종은 이미 심각한 병약함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었고, 정치의 중심에 설 만한 체력도, 의지도 충분치 못했다. 정사는 그를 과묵하고 정직하나 몸이 병약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한국사 뒷이야기에는

    예종의 즉위가 사실상 세조가 남겨둔 정치적 불씨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세조 치세 후반은 이미 왕위 계승 문제로 불안정했다. 장자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세조는 차남 예종을

    후계로 삼았지만, 대신들 사이에서는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당시 자을산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즉위 첫날 새벽, 예종은 이러한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 예종 정치사 ‘한국사 뒷이야기’

    "세조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한국사 뒷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즉위 직후 신하들에게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잇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짧은 고백은 곧 그가 지닌

    불안정한 왕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즉위 직후부터 예종의 정치는 철저히 세조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세조가 정비한 중앙집권적 체제,

    강력한 왕권 구조는 겉보기에는 굳건했지만, 실상은 왕권과 대신들 사이의 갈등을 키운 뇌관이었다.

    병약한 군주는 이 갈등을 해결할 힘을 가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예종의 정치사는 시작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오, 예종 정치의 긴장 대신들과의 대립과 흔들리는 조정

    예종 재위 기간의 정치적 핵심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군주와 권력을 잡으려는 대신들의 갈등이었다.

    예종은 단명한 군주였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름의 개혁과 정치적 결단을 보여주려 했다. 그는 특히

    군사 방비와 지방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왜구와 여진의 움직임이 여전히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약하지만,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다

    정사에 따르면 예종은 즉위 후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지방 수령들의 업무를 재점검했으며,

    중앙과 지방의 행정망을 정비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대신들의 권력 다툼이었다. 한명회, 신숙주 등

    세조 때부터 권력을 쥔 대신들은 어린 성종을 왕위에 올려 섭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예종은 외롭게 조정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국사 뒷이야기는 이 시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전한다. 어느 날 정오 무렵 회의 자리에서, 예종은 신하들의 반발에 목소리를 높이며 나는 병약하지만,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신하들은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고, 그 침묵은 곧 왕의 외로움을 의미했다. 이 장면은 예종이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결국 그의 정치적 노력은 제도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대신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고, 예종은 점차

    국정을 직접 다스리기보다 형식적인 군주로 남아갔다. 이 정오의 긴장된 순간들은 곧 그의 단명으로

    이어질 불운한 결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해질녘, 짧은 생애와 왕위 계승 예종 정치의 뒷이야기

    1469년 여름, 예종은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며 끝내 붓을 잡을 힘조차 잃었다. 해질녘, 그는 가까운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왕이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뜻이 백성에게 닿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불과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종의 죽음은 단순한 왕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조선 왕위 계승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대신들은

    어린 성종을 왕위에 올리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그를 제치고 조카인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뒷이야기를 남긴다.

     

    실질적 정치보다는 왕권의 덧없음과 권력 구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이야기

    이는 곧 예종이 생전에 그토록 우려했던 자신의 왕위가 잠시 머무는 자리일 뿐이라는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한국사 뒷 이야기에는 예종의 죽음 뒤, 그의 묘 주변에서 매일 새가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이었으나 왕답게 살지 못한 한 많은 영혼의 울음이라 해석했다. 반대로 정사에서는 그를 효심이 깊고 검소했으나 병약하여 정치를 오래 펼치지 못했다라고 기록했다.

    결국 예종의 정치사는 실질적 정치보다는 왕권의 덧없음과 권력 구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세조가 만들어놓은 강력한 왕권 체제는 오히려 예종 같은 병약한 군주에게는 짐이 되었고, 대신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그는 역사에 짧지만 의미 있는 군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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