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그늘 속 직업, 백정: 피와 칼로 생존을 잇다
조선 시대, ‘백정’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직업을 넘어서 사회적 낙인을 의미했다.
본래 백정은 고려 말까지는 소, 돼지 등의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손질하는 기술자였고, 초기에는 '일반 평민'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성리학적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으면서 점차 육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고,
도살과 사냥 같은 직업에 대한 혐오도 심화됐다.
그 결과,
백정은 사회 최하층 신분으로 추락하며 ‘천민’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호적에조차 따로 등록되었으며,
일반 백성과의 혼인도 금지되는 등 일상적으로 철저한 차별을 받았다. 백정의 자식은 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한
세습 구조가 고착되었고, 심지어 한양의 시장에서는 백정이 지나가면 길을 터줘야 한다는 규범까지 존재했다.
고기와 칼의 기술자, 그러나 사람 대접 못 받은 이들
백정의 주요 업무는 도축과 유통이었으며,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정형하는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었다.
특히 소는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재산이었기에 도축할 경우 지방 관청의 허가가 필수였고, 백정은 그 과정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이었다. 그 외에도 백정은 군에서 무기용 가죽을 공급하고, 궁중에 가죽 제품을 납품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백정은 한양과 지방의 육류 유통망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백정은 언제나 '천민'으로 취급되었고, 일반인과 다른 옷을 입어야 했으며, 관직은커녕 동네 의논 자리에도 끼지 못했다.
어떤 백정은 인간 대접을 받기 위해 스스로 성씨를 바꾸고 호적을 조작했으며, 일부는 돈을 벌어 양민과 혼인을 시도했지만 사
회적 편견의 벽은 높았다.
차별에 맞선 외침, 백정의 근대적 각성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백정 사회 내부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실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192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백정 출신 지식인 장지연과 박중빈 등은 ‘형평사(衡平社)’를 설립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슬로건 아래 백정 차별 철폐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산시켰고, 이를 통해 백정 출신들이
점차 교육을 받고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형평 운동은 한국 근현대 민권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백정이 더 이상 숨겨야 할 과거가 아닌,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로 등장한 중요한 계기였다.
백정은 역사 속에서 차별받고 비천하다고 여겨졌던 계층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노동과 인권투쟁을 통해 더 넓은
‘평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조선의 백정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한국사 속 불평등 구조의 거울이자,
인간 존엄의 회복을 위해 싸운 민중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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