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책 정치사
조선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책 정치사를 '그날의 기록' 한국사 뒷 이야기
새벽, 민본의 군주가 백성을 바라보다 – 전분 6등법을 반포한 날
1444년 음력 4월의 새벽, 세종대왕은 창덕궁 인정전의 작은 창을 열었다. 밤새 비가 내리고 멈춘 하늘
아래, 궁궐 바깥 민가에서는 물 빠진 논바닥을 정리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날은
조선왕조의 새로운 세금제도,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이 반포되는 날이었다. 단순한 조세 개혁이 아닌, 세종이 오래전부터 고심해온 애민 정치의 정점이자, 백성을 위한 실질 행정의 결정판이었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여러 해에 걸쳐 논의와 실험을 반복한 끝에 이 제도를 완성했다.
비옥도에 따라 농지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에 따라 세금 비율을 달리하는 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기존의 획일적 세금 제도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세종은 이를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다. 그는 실록에서 “백성이 곡식을 거두지 못하면 왕도 곡식을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라며, 임금이 먼저 백성을 걱정해야 한다는 신념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사 뒷 이야기는 전분 6등법이 반포된 그날 새벽 세종이 자신의 침전에서 일찍 일어나
직접 농지 지도와 세금표를 살펴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옆에 있던 신하가 “전하, 이는 하위 관료가
처리할 일입니다”라고 하자, 세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백성의 곤궁을 모른다면, 누가 대신 그 마음을 알겠는가.”
그 말 한마디는 ‘백성의 배를 불리는 정치’를 표방한 그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다.
정오, 인정전에서 울린 법령 – 백성 중심 정치의 실현
정오 무렵, 인정전 앞마당에 대신들과 각 도의 수령들이 모였다. 왕명을 따라 전분 6등법 시행을 알리는
국문 문서가 낭독되었고, 수령들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료적 절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 새로운 조세법은 조선 농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였고, 왕이 백성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분명한 신호였다.
전분 6등법과 함께 시행된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해마다
풍흉(豊凶, 수확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 양을 조정하는 제도로,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는 장치였다. 이 법은 정종 시기부터 논의됐으나, 세종이 이를 체계화하고
전국에 확대 시행한 것이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정책은 관료 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조선 초기 행정체제의 모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사 뒷 이야기는 이 날 세종이 인정전 회의 직후, 신하들과 따로 모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백성은 나의 부모와 같다. 부모의 밥그릇을 덜어내는 정치는 할 수 없다.”
이 말은 당시 관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일부 사헌부 관료들이 “세금 문제로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관리가 있다면 가차없이 탄핵하겠다”는 서약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은 군주의 위치에서 백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 속에서 군주의 책임을 자각한 통치자였다.
해질녘, 광화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 – 애민정치의 유산
해질녘, 궁궐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민가의 소음 속에는 그날의 작은 변화가 담겨 있었다.
세금을 줄인다는 공식 발표에 마을 어귀에서는 작은 잔치가 열렸고, 시장에서는 장사꾼들이
“이제는 세금이 두렵지 않다”고 웃으며 소주 한 잔을 나눴다. 그날 조선은 진정한 의미에서 백성을 위한
국가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정사에는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 전국적으로 정착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제도의 핵심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왕의 정치 철학에 있었다. 세종은 말로만 백성을 위하지 않았고,
제도로 실천했다. 수십 년 뒤 세종을 회상한 사헌부 대사헌 이윤우는 이렇게 남겼다.
“세종은 백성의 고통을 숫자로 보지 않고, 하루의 끼니로 헤아렸다.”
이러한 시선은 이후 조선의 이상적인 군주상(君主像)을 정립하는 기준이 되었고, 세종의 애민정치는
단순한 정책이 아닌 군주의 자격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국사 뒷 이야기는 그날 저녁, 세종이 창밖을 바라보며 궁녀에게 “궁궐 안은 조용하구나”라고 말하자,
궁녀가 대답했다.
“전하의 법이 백성을 편히 하였으니, 궁 안도 평안한 것이옵니다.”
그 짧은 대화 속에 세종의 정치는 완성되었다. 조용한 궁궐, 평온한 백성. 그것이 바로 세종이
꿈꾼 나라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