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흥선대원군의 한국사 뒷이야기

+ing 2025. 8. 8. 16:44

조선 말기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흥선대원군의 한국사 뒷이야기(야사, 정치적 배경)

 

왕의 아버지, 섭정의 권력을 움켜쥐다

19세기 조선은 안으로는 삼정(三政)의 문란과 민중의 불만이 극심했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투

위협이 본격화된 격동의 시대였다. 이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그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신하들과 대비 조씨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아들 이명복(훗날 고종)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시작했다. 정식으로 국왕이 아니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을 쥔 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 조선을 사실상 통치하며 강력한 개혁 정치를 펼쳤다.

 

흥선대원군은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지방 수령까지 부패와 무능을 철저히 숙청하면서 왕권 중심의 정치를 복원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세도정치 척결이었다. 안동 김씨 등 권문세가들의 세도정치는 조선 후기를 부패와 피폐로 몰고 갔으며, 대원군은 이들을 강력히 탄압하고 인사권을 대폭 국왕 직속으로

환원시켰다. 또한 백성들의 불만이 가장 컸던

환곡제(還穀制,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고리로 되갚게 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민생 안정을 위한

호포제(戶布制, 양반도 군포를 내게 함)를 도입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단순한 개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상징적 조치를 통해

왕권의 상징성을 부활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전국에 당백전(當百錢, 화폐 개혁)을 강제로

유통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사람들은 대원군은 궁궐을 세우려 나라를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내놓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원군에게 국가는 군주의 것이고,

개혁은 곧 절대 권력 회복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한국사 뒷이야기

쇄국과 저항의 정치, 그리고 외세와의 충돌

흥선대원군의 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강력한 쇄국 정책이었다. 그는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침투 도구로 간주하고 철저히 탄압했으며, 이를 위해 병인박해(1866)를 단행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

 

이 사건은 곧 프랑스의 군사 보복(병인양요)으로 이어졌고, 조선은 외세의 위협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정족산성과 강화도를 중심으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이를 승리로 이끌면서 백성들로부터 충신이미지도 얻게 되었다.

 

이후에도 미국과의 무력 충돌(신미양요, 1871)이 발생하였고, 대원군은 광성보를 중심으로 격렬한 저항을

전개했다. 비록 무력과 장비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서양 오랑캐와는 통상도 없고 외교도 없다는 일념 아래, 그는 철저한 문호폐쇄정책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 물결에서 한참 뒤처지게 되었지만,

당시의 조선 현실 속에서는 무능한 왕실과 부패한 양반들이 망쳐놓은 조국을 외세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의식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쇄국주의는 결국 조선 내부에서 정치적 갈등을 낳았다. 특히 일본이 점차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상황에서, 대원군의 폐쇄주의는 개화파나 실학자들에게는 시대착오적 반응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은 외세보다 더 위험한 내부 정치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정체제로 이어지면서 대원군의 정치 기반이 약화되는 계기가 된다. 대원군은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실각하게 되며, 10년의 철권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몰락, 재등장, 그리고 조선 몰락의 서막

흥선대원군은 실각 후에도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후 조선 정치의

그림자 권력으로 계속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2년 임오군란이다. 구식 군인들의 폭동 속에서

민중은 대원군의 복귀를 외쳤고, 그는 일시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는 청나라의 개입을

불러왔고,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중국으로 압송하면서 그의 정치 생애는 또다시 끊기게 된다.

이후 3년 만에 조선으로 송환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더 이상 없었다.

 

야사에서는 이 시기의 대원군을 두고 왕보다 더 왕 같은 존재, 그러나 왕이 될 수 없었던 사내

표현한다. 실제로 대원군은 한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신분과 정치적 도리를 지킨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아들 고종조차 견제했던 냉혹한 권력가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순적인 인물상이 바로 흥선대원군을 한국사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로 만드는 이유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개혁하려 했지만, 그 방식은 철저히 전근대적이었다. 그가 막은 문호 개방은 단기적으로는 주권 수호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의 국제 고립과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나라를 지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그의 시대 이후 더욱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