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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세종대왕의 업적, 그가 ‘성군’이라 불리는 이유

+ing 2025. 7. 24. 19:00

조선의 근본을 바꾼 위대한 왕의 세 가지 업적

한국사 세종대왕의 업적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창제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단연 첫 번째는 훈민정음 창제입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공식 문서는 모두 한문(漢文)으로 작성되었고,

일반 백성은 이를 읽거나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세종은 이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백성들이 자신의 말소리를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

즉 우리말을 위한 글자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백성을 위한 문자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조합할 수 있으며,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창제 방식은 유럽 알파벳이나 중국 한자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언어 체계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단순히 글자를 만든 것을 넘어,

조선 사회 전반에 지식 확산과 계층 간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세종

세종대왕 치세는 조선의 과학기술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발명과 제도적 혁신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그 중심엔 장영실이라는 천재 과학자가 있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사람 역시 세종이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의 지원 아래 자격루(자동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강수량 측정기) 등을 개발하였고,

이러한 기기들은 천문·기후 관측을 통한 농업 행정의 정확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측우기는 세계 최초로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한 기기로,

당시 조선이 얼마나 정교한 과학 행정 체계를 운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세종은 천문 관측과 역법 개정을 위해 칠정산(七政算)이라는 독자적인 천문력을 편찬했으며,

그동안 중국력에 의존하던 체제에서 탈피해 조선만의 하늘 계산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국가 주권과 과학적 자립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민본(民本)을 실현한 개혁 군주

세종은 단순한 학문군주가 아닌, 철저한 민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직접 지방관의 보고를 읽고, 백성의 삶을 기록한 문서를 꼼꼼히 검토했으며,

당시 실록에는 "임금이 백성의 질병을 슬퍼하고, 백성의 굶주림을 함께 걱정했다"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는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의창(義倉) 운영 강화, 노비 해방 조치,

농업 장려 정책, 지방 민심 수렴을 위한 사간원·사헌부 독립 강화 등을 시행했습니다.

 

또한 세종은 형벌 제도에서도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잔혹했던 고문과 가혹한 처벌 관행을 줄이기 위해

국문(국가 재판)의 절차를 체계화하고, 억울한 옥사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 누구보다도 사람은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억울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고 이는 곧 한글 창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