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고전문화 속 패러디 시
한국사 속의 고전문학에도 패러디가 있었다?
이런 패러디 시(詩)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꼬고, 권력을 풍자하거나, 때로는 친구들끼리 유쾌하게
놀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고전문화 속 패러디 시는 그 자체로 당시 사람들의 재치와 위트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는 동시에, 글을 통해 웃음과 풍자를 선사했습니다.
대표적인 패러디 시의 사례들
조선시대 대표적인 패러디 시의 사례는 정철의 관동별곡을 비튼 이야기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은 원래 자연의 아름다움과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 장편가사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비꼬는 패러디가
조선 후기에 유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비는 술에 취해 자신이 쓴 글을 스스로 패러디했습니다.
“금강산도 좋지만, 안주 없는 술상은 더 싫더라.”
이는 관동별곡의 자연찬미를 뒤집어 현실적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유학자들은 벼슬을 탐하는 선비들을 풍자하기 위해, 유명한 고전시를 바꾸어 불렀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검은 갓은 남의 뜻이라.”
원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라는 청산별곡의 한 구절을 비틀어, 검은 갓(벼슬과 권위의 상징)에 집착하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이처럼 고전 시를 패러디한 글들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은근히 유행했습니다. 정통 고전을 모르면 웃을 수 없기에,
패러디 시는 지식인들만의 유머 코드이자 풍자 문화였던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즐긴 해학과 패러디
조선시대에는 패러디 시가 단순히 문인들만의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패러디
노래와 시가 유행했습니다.
예
농민들은 유교적 경전을 빗대어 현실을 풍자했습니다.
『효경(孝經)』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가르치지만, 농민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효도란 부모님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이라는데, 밥이 없으니 효도할 수도 없구나.”
이는 가난한 현실을 유머로 풀어낸 패러디였습니다.
②“극락세계는 못 가도, 동네 술집에는 갈 수 있다.”
이는 신앙적 경구를 유머로 바꾸어 일상 속 스트레스를 해소한 방식입니다.
이렇듯 조선의 패러디 문화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패러디는 유일한 말장난이자 삶의 활력소였던 것입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패러디의 정신
고전문학 속 패러디는 단순한 웃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패러디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말하고, 때로는 권력을 비꼬며, 자신들의 현실을 위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