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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한국사이야기

+ing 2025. 7. 8. 16:54

세도정치 한국사이야기

정조의 죽음과 정국의 변화: 왕권의 공백이 부른 권력 다툼

조선 후기,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조(正祖)의 집권기는

조선 후기의 마지막 르네상스로 평가받을 만큼, 개혁과 문화 진흥, 실학 사상 발전이 눈에 띄던 시기였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오른 순조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국정은 정조의 장인이자 외척인 김조순(노론 안동 김씨)

손에 넘어갑니다. 이때부터 약 60년 가까이 조선을 지배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됩니다. 세도정치는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특정 외척 가문이 정국을 독점하는 정치 체제로, 순조헌종철종에 이르기까지 왕권은 거의 형식적으로만 존재했고, 실권은 몇몇 가문에 의해 좌우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도 가문은 안동김씨, 풍양조씨로, 이들은 혼인을 통해 왕실과

혈연관계를 맺고 정권을 이어갔습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의 정치 독점과 부패 구조

순조가 즉위한 이후 실권을 잡은 안동 김씨는 관직을 독점하고, 모든 중앙 행정의 인사권을 장악했습니다.

김조순을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이 영의정, 좌의정, 병조판서, 대제학 등 요직을 차지했고, 심지어 지방관과 향리까지 낙하산

인사를 감행했습니다. 풍양 조씨는 헌종 때 조만영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아 세도정치를 이어받았으며, 다시 철종 때는 김좌근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권력을 탈환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외척 가문 간의 권력 교대는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지배 구조를 재생산하는 순환 고리에 불과했습니다.

 

이 시기 과거제는 철저한 매관매직의 장으로 전락했고, 돈으로 벼슬을 사고팔 수 있는 병폐가 만연했습니다. 중앙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한 결과, 지방의 수령들은 백성을 수탈해 중앙에 상납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유지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과 천민, 노비, 백정 등 피지배 계층에게 돌아갔습니다. 민생은 피폐해졌고, 농민들은 잦은 흉년과 병역, 부역에 시달리며

향촌 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세도정치 체제는 정치적 안정 대신 탐욕과 부패, 인사 독점을 통한 정치

기득권 유지라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민란과 종교, 새로운 움직임: 저항의 시대

세도정치는 단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야기된 사회 경제적 불균형과 부패는 조선 후기를 뒤흔드는 민란과

저항의 도화선이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1811)입니다. 홍경래는 평안도 지역에서 차별받던 서북인과

몰락한 양반, 농민과 광산 노동자들을 규합해 부패한 중앙 권력과 조세 착취에 반기를 들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봉기는 단순한 반란이 아닌, 피지배층의 삶과 권리를 위한 최초의 집단 행동으로 평가됩니다.

 

이 외에도 19세기 중반 이후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의 부패)에 반발한 민란들이 전국적으로 잇따랐고, 종교 영역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천주교와 동학 같은 새로운 사상과 종교는 양반 중심의 질서에 저항하고 인간 평등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았기에 급속히 민중 사이에 확산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도 가문들은 이를 체제 전복을 노리는 사상으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수많은 순교자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결국 세도정치 하의 조선은 상층은 타락하고 하층은 분노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