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역사 속 뒷 이야기 고려 ‘망한 왕조들’ 집중 해부

+ing 2025. 7. 7. 10:49

한국역사 고려 ‘망한 왕조들’ 집중 해부

위대한 시작, 그러나 균열된 내부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개창한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귀족 중심의 체제를 유지하며 약 500년간

한반도의 중심 왕조로 군림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찬란했던 고려는 내부적으로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문벌 귀족 중심 체제의 고착이었다. 초기에는 개국 공신들과 지방 호족 간 균형이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경원 이씨, 안산 김씨, 경주 최씨 등 특정 귀족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지방 사회와 중앙 정치의 단절이 심화되었다.

 

과거제를 통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귀족 자제들의 입신 수단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왕권은

점점 약화되고, 국정은 귀족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렸다. 백성들은 중세 봉건 체제 아래에서 무거운 세금과 노역에 시달렸고,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등 기층 사회의 불안도 지속되었다. 고려는 왕조로서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내부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변과 권력 투쟁의 연속

고려의 몰락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1170년 무신정변이다. 무신들은 오랜 기간 문신 중심의 정치 구조에서

차별받다가 결국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으며, 이후 약 100년간 무신 집권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결코 안정되지

못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등 권력을 잡은 자들은 짧은 기간 내에 암살이나 숙청으로 교체되었고,

무신 간의 권력 투쟁은 끝이 없었다. 특히 최충헌과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정권시기에는 군사와 정치를 모두 장악하며

독재에 가까운 통치를 했지만, 여전히 민심을 얻지 못한 채 유약한 왕실을 방패로 삼는 형태였다. 이 과정에서 지방 반란 세력도 점차 성장했고, 대표적으로 **만적의 난(1198)**이나 김사미·효심의 난 등 하층민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무신 정권은 고려를 실질적으로 무장 귀족국으로 만들었고, 이는 이후의 몽골 침입에 대응하지 못하는 허약한 구조로 이어지게

된다. 왕은 있었지만 왕의 권위는 없었고, 국가는 있었지만 통합된 힘은 사라진 시기였다.

 

몽골과의 치욕적 관계, 그리고 마지막 쇠퇴

고려를 결정적으로 몰락의 길로 밀어 넣은 것은 외세의 침입, 특히 몽골 제국과의 관계였다.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고려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저항에 나섰지만, 이로 인해 백성들은 무방비 상태로 남겨져

수십 년간 고통을 겪었다. 결국 고려는 1259년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왕실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이후 고려의 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며 왕위를 보장받는 대가로 자주권을 상당 부분 포기했다. 공민왕 시기 일부 자주 회복이

시도되었지만, 원명 교체기 혼란 속에서 새로운 권신 세력과 외척이 부상하면서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신흥 무장세력의 부상과 이성계의 등장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결국 1392,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는 명목상의 왕조로 막을 내린다. 고려의 몰락은 단순한 외세 침입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내부

부패, 무능한 권력 구조, 대응하지 못한 국제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