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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궁중음식 한국사 뒷이야기

+ing 2025. 7. 3. 19:40

시대별 궁중음식 한국사 뒷이야기

 

조선시대 왕의 식탁, 수라상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정치와 의례, 권위를 상징하는 국가의 일상적인 의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수라상이 하나의 고정된 형식으로 이어졌다고 오해한다. 사실 궁중음식은 조선 전기와 후기,

그리고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형태와 내용이 달라졌으며, 왕의 성격이나 정치적 상황,

외교 관계까지 음식에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태종이나 세조 시기에는 권력 장악을 위한 엄격한 궁중 질서 속에 음식도 절제된 형식이 강조되었고, 반면 영조와 정조 시기에는 문화예술과 실학이 발달하면서 수라상에도 다양성과 풍성함이 더해졌다. 특히 정조는 왕실의 건강을 중시하여 각종 보양식과 약선 음식의 비중을 높였으며, 이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왕의 식탁은 그 시대의 정치 기류와 미각의 흐름을 반영하는 바로미터였던 셈이다.

시대별 궁중음식 한국사 뒷이야기

조선 전기

 고려 후기의 연향 문화가 일부 계승되었고, 유교적 형식주의가 강화되며 식탁 역시 검소하고 절제된 형식을 갖췄다.

특히 세종대왕 시기에는 백성의 건강과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왕실 식탁에서도 의학적 식문화가 본격 반영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세종은 위장이 약한 문종을 위해 특별히 죽 종류를 자주 수라에 올리게 했고, 음양오행에 따라 계절별로

맞는 재료를 조절하도록 지시했다.

 

또 당시에는 외국 사절이나 유학파 신하들의 왕래로 인해, 식재료 중 중국에서 들여온 참기름, 간장, 건표고 같은 식자재가

혼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국제적 외교 환경이 식문화에 미친 사례다. 중종대에는 간신 조광조의 개혁 시도와 함께 음식에서도

검박함이 강조되어 지나친 잔치음식은 권장되지 않았으며, 반면 연산군처럼 사치와 향락을 즐긴 군주 시기에는

특별 음식과 향료가 과도하게 수라에 올라 신하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선 후기

궁중음식 문화가 대폭 재편된 시기였다. 전쟁과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지만, 역설적으로 왕실은 권위 회복을 위해 더욱 풍성한 연회와 음식 문화를 구축했다. 숙종, 영조, 정조 시기는 특히 궁중음식의 체계화가 두드러졌고, 이 시기의 기록들이 후대

복원 작업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진연의궤’, ‘진찬의궤등 각종 의궤에 구체적인 상차림과 요리법이 상세히 기록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 진상된

특산물을 활용한 다채로운 요리가 수라상에 오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장수와 건강에 관심이 많아 음식에도 약초, , 인삼 등을 적극 사용하게 했다. 또 정조는 병조참판 홍현주에게 명해, 수라상에 올릴 음식의 청결과 정갈함을 최고 기준으로 삼았고,

왕의 식사를 준비하는 상궁의 역할을 의전적으로도 크게 격상시켰다. 음식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정치적 연출의 수단이 되었다.

 

대한제국

궁중음식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속히 쇠퇴하는 전환기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황실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고, 이로 인해 음식도 극도로 화려해졌다. 서양 사절단과의 접견을 위한 연회에서는 한식과 양식이 절충된 메뉴가 등장했고, 이는 조선 왕실의 퓨전 음식이라는 흥미로운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도래하며 왕실 해체와 함께 궁중음식은 단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조선 말기 수라간 상궁 한희순이 궁중음식을 외부에 전수하면서 맥이 이어졌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 궁중음식 복원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왕의 식탁은 시대마다 다르게 변화하고 의미를 더해가며 한국 음식문화의 고유한 흐름을 만들어왔다. 교과서에 담기지 않은 이 시대별 식탁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음식 이상의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