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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서울 한복판에 교과서에는 없는 한국사 뒷이야기

종로 골목 끝, 사라진 왕비의 무덤 사직단의 다른 이름 

서울 한복판에 교과서에는 없는 한국사 뒷이야기

서울 종로의 한적한 언덕길,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사직공원이라는 곳이 나온다. 시민들은 그저 나무가 우거진 공원이나 놀이터쯤으로 생각하지만, 이곳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었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던 유서 깊은 장소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조선의 국가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국조(國祚)를 상징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왕실이 패망한 이후 이곳이 방치되며 일제강점기에는 유흥시설과 정원이 조성됐고,

일부 지역은 아예 개인 주택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 언덕 아래서 왕이 나라의 뿌리에 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청계천 너머, 궁녀들의 눈물이 흐르던 금천교 아래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도심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이곳에는 산책로인공폭포’, ‘디지털 안내판이 즐비하지만,

그 아래에는 한 맺힌 여성들의 흔적이 있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던 금천교(金川橋)는 조선시대 형장(刑場)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이었다.

 

특히 왕실 내부에서 사약을 받은 후궁이나 폐비가 마지막으로 건너던 다리라는 점에서, 이곳은 궁중에서 쫓겨난 여성들의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불리기도 한다. 폐비 윤씨, 장희빈 등 수많은 여성들이 이 다리를 넘어 의금부로 향했고, 돌아오지 못했다. 교과서에는 단 한 줄로도 소개되지 않지만, 금천교 아래의 물은 그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덕수궁 돌담길, 사랑이 아니라 고립의 상징

연인들의 산책로로 잘 알려진 덕수궁 돌담길은 로맨틱한 분위기의 대표 코스로 인식되지만, 이 길에는 오히려 사랑의 끝과 이별의 상징이 담겨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한 뒤 이곳 덕수궁에 유폐되다시피 살아야 했다.

 

그의 마지막 세월은 외교적 고립과 정치적 배신의 연속이었다. 특히, 고종의 아내 순헌황귀비(엄씨)는 황실의 복원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제의 감시 속에서 번번이 좌절되었다. 덕수궁 후문에서 정동교회를 지나 미국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이 돌담길은,

 

당시 왕실 인사들이 일제 감시 하에 몰래 연락을 주고받던 통로였으며, 때로는 피신로이자 망명 통로로도 활용되었다. 돌담길은

낭만의 산책로가 아니라, 사실은 황제와 황실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갔던 석조 감옥의 경계선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한국사 뒷이야기

동대문 밖, 왕자들이 사라진 자리 제기동의 비밀

서울 동쪽 제기동은 한때 '빈민가'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왕족들의 유배지이자 유배 전 환궁을 기다리던 중간지점이었다. 특히 의친왕, 영친왕 등 대한제국 말기의 왕자들이 머물렀던 집터나 외국 귀빈 접대용 별궁이 흩어져 있었지만, 대부분 일제에 의해 헐리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제기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제사를 지내던 터(祭基)'에서 유래되었고, 이곳에는 왕실에서 축출된 인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간

사연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