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진관 체제: 지역 방어 중심으로의 전환
조선 초기에는 국방 체계로서 고려 말부터 이어진 병영·수영 중심의 제승방략체제를 운영했습니다. 이는 전쟁이 일어나면
중앙에서 지휘관을 내려보내 여러 지역 병력을 한데 모아 싸우는 방식으로,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현지 방어력 부재와 지휘의 혼선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세조는 전국을 방어하는 체제를 개편하여 진관 체제를 도입합니다. 이 체제는 각 지역별로 ‘진(鎭)’이라는 군사 요충지에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 적의 침입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지방 분산형 방어 체계였습니다. 군사는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편제해 지역 책임을 강화했고, 군역 대상자인 양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였습니다. 이 개편은 기동성보다 지역 방어를
중시하며, 방어 위주의 국방 개념이 정착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병역 회피, 장기 복무 기피,
그리고 지방 행정의 부패가 겹치면서 제도는 점차 약화됩니다.
임진왜란과 훈련도감의 등장: 직업군인의 출현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은 조선의 기존 군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평시 군사력이 거의 유명무실해져 있었고,
제승방략에 의존한 군사 구조는 현장에서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이에 조선은 전시 상황에서 급히 의병, 승병, 향토군
등을 소집해 방어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혼재하는 복합적인 군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중앙에서 보다 체계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1593년 설치된 것이 훈련도감(訓鍊都監)입니다.
이는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상비군 조직으로, 화포와 총통, 조총 등의 화기를 주로 다루는 병종을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훈련도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도 정치기 군권 장악 수단으로 악용되며, 왕권과 신권, 그리고 군권의 균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결국 조선 후기 군제의 또 다른 위기를 낳는 씨앗이 됩니다.
조선 후기의 개혁 시도: 속대제와 장용영
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 세도 가문들의 군사 권력 장악과 기존 군제의 무력함에 주목하며 개혁을 시도합니다.
영조는 병역 회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대제(束隊制)를 도입합니다. 이는 병역 대상자가 대신 비용을 지불하면
속오군(속오군)은 용병으로 대체하여 군역을 유지하는 제도로, 일종의 대납병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한 병역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조는 이에 반해 왕권 강화를 위해 용영(壯勇營)을 설치합니다. 이는 수도 한양과 수원화성을 방어할 상비군 조직으로,
기존 5군영 체제와는 별도의 군영이었습니다. 정조는 장용영을 통해 친위세력을 군사적으로 확보하고자 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왕권 강화의 상징적 시도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장용영은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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